최초의 발견 사례는 1928년 9월 28일 새벽에
영국의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했다. 실험을 위하여 샬레에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휴가를 갔다 왔는데 하필 샬레의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았고, 다시 연구실에 돌아와보니
뜬금없이 어디선가 날아온 괴상한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전부 먹어치워버린 것이다.이 곰팡이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는 말이 많다. 그냥 창밖에서 곰팡이가 날아왔다는 설도 있고, 플레밍의 실험실 바로 밑층이 곰팡이 실험실이라 거기서 넘어왔다는 설도 있고... 다만 확실한 것은 만약 그가 포도상구균을 성공적으로 배양하고 뚜껑만 제대로 닫아 푸른곰팡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페니실린의 발견은 한참 미뤄졌을 것이다. 이처럼 푸른곰팡이를 발견한 계기 자체는 순전히 우연이었던 셈이다.
본인의 실수로 졸지에 실험을 망쳐버렸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관찰이 끝난 표본을 바로 처분하지 않고 한동안 묵혔다가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 기묘한 버릇이 있었던
[3] 플레밍은 샬레를 폐기처분하는 대신에
세균을 먹어버린 그 곰팡이의 (정확히는
푸른곰팡이의) 성질을 연구함으로써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이 푸른곰팡이가 만드는 분비물로 만든 항생제는 수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이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손꼽힌다. 만약에 페니실린 연구가 없었다면, 현대의학은 지금보다 몇 세대는 뒤처져 있었을 것이다. 페니실린 이후에 비슷한 개념과 방법으로 수많은 오만가지 항생제가 우후죽순 연구되면서 다양하고 참신한 방법들로
백신과
항생제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가속되어 인류는 질병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혁신과 진보를 이루어내게 됐으니, 실험에 실패한 부산물에 대한 어느 과학자의 흥미가 만들어낸 실로 거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페니실린은
박테리아, 즉 세균의 세포벽을 합성하는 효소를 날려버려서 세포벽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세균 세포가 분열을 시도할 때 둘로 나뉜 부분에 격벽이 생기지 않아 내용물이 흘러나오면서 죽게 된다.
영상에서 왼쪽. 따라서 생식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번식을 포기한 세균들만이 살아남고, 이들은 몸의 면역력 때문에 자연박멸된다. 세균과 달리 인체세포와 같은 동물세포에는 세포막이 있을 뿐 세포벽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서, 페니실린이 아무런 악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4] 인체에 공존하는 수많은 이로운 미생물들도 싸그리 죽여버리는 부작용도 있지만, 원래 항생제란 것이 대부분 다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크게 해로울 것은 없고 항생효과가 끝나가면 몸 속의 미생물들은 별 문제 없이 다시 번식을 시작하므로 혹여라도 이러한 점을 걱정한다면 안심해도 좋다.
하지만 초창기의 페니실린은 온도, 환경 등이 무진장 적절해야 살아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했다. 게다가 발견 당시에는 천연 페니실린을 다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고, 몸에 투여한 후에도 반감기가 30분 이내로 짧아 쉽게 배설되는 문제가 있어 실제로 질병 치료에 이용되지는 못하였다. 페니실린이 발견될 때의 곰팡이 종류가 워낙 생장이 느렸던 데다, 공기와 상시로 접촉하지 않으면 곧바로 사멸하는 민감한 종이었다. 공기펌프를 쓰는 대용량 배양탱크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민감했기에 실험실 수준의 규모로만 생산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힘든 정세인 데다 신약에 대한 제약회사들의 망설임까지 겹쳐 값은 비싸고 양도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 생산된 양을 재사용하기 위해 투약 환자의 소변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하여 다시 써야 할 정도였다.
# 가끔 플레밍의 제자들이 눈병 치료에 좋다고 연락을 하는 등 효과는 좋았지만, 지극히 부족한 양 때문에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
설파제"
[5]란 것이 발견되자 플레밍은 불안정한 페니실린을 제쳐두고 그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한편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이 예전에 발견했던
라이소자임[6]을 연구하다가, 점차 페니실린에도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플레밍과 비슷하게 페니실륨을 만들어냈고, 화학적 처리를 통해 가루 형태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즉시
쥐들에게 약을 주사하여 효과를 관찰했고, 24마리 중 23마리가 살아남는 결과를 발표했다. 플레밍은 이를 보고 즉시
옥스퍼드대학교에 달려가서 자신의 초기 페니실린 표본을 줬고, 플로리와 체인은 이를 더욱 연구하여 한 사람에게 쓸 수 있을 만큼의 양을 만들고, 세균에 감염된 환자에게 주사한 결과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페니실륨의 양이 부족하여 치료를 중단했고, 안타깝게도 그 환자는 병이 다시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로써 그들은 이 물질이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음을 알아채고, 더욱 연구를 했다. 그때가 한창 2차 대전 중이라서 연구시설이 공습을 받을 것을 우려했고 대량생산에 필요한 자금을 구할 수도 없었지만,
미국의
록펠러 재단에서 지원해주겠다는 연락이 오자 그들은 모든 자료를 들고 미국으로 날아가서 공장을 세운다. 결국 페니실린 크리소게눔
[7]이란 종이 발견되어서야 배양액 탱크에 공기를 불어넣는 방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페니실린은 알약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 2차 대전 이후에 페니실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박테리아로 인한 병을 치료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플레밍 경은 페니실린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한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체인(Ernst Boris Chain)과 함께 1945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방사능 오염지역,
화산,
북극, 심지어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생존왕스러운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8]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페니실린을 파괴하는 '베타-락타메이스
[9](Beta-lactamase)'라는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도 등장했다. 그 후, 1959년에 나온 메티실린과 같은 합성 페니실린은 베타-락타메이스에
가수분해되지 않도록 화학적 구조변경을 하였으나, 1961년 세포벽 합성 효소의 구조에 돌연변이가 생겨 아예 페니실린 계열의 항생제가 듣지 않는
MRSA[10]가 등장했다. 그 후 지금까지 이래저래 세균과 인간의 물고 물리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후 채산성이 안 맞아서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하는 페니실린은 생산 중지되었다. 비록 MRSA와 같은 몇몇 위험한 균들은 페니실린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고, 또 상술했듯이 페니실린은 내성균이 잘 생기는지라 강력한 항생제는 아니지만,
매독 등 몇몇 질환에서 매우 탁월한 효과를 보여준다. 특히 매독의 경우 2기까진 페니실린 주사 몇 번으로 완치될 정도로 특효. 현재 나오는 페니실린계 항생제는 모두 인공적으로 합성된 제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