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장군 장교가 여기를 정벌했다가 초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이곳 풍속을 따르고 전왕을 자처한 것이
중원 세력과의 첫 접점 기록이다.
[13] 이후
한나라 한무제 시기 처음으로 중국의 통일왕조 치하에 들어왔고
익주에 편입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맹획이
왕으로 나오고 정글과 독천으로 뒤덮인
남만이라고 부르는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14] 칠종칠금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촉한의 남만 토벌은 사실이지만 독사와 전갈이 득시글대는 정글로 묘사되는 연의의 서술은
나관중의 창작인데, 중세까지 중국인들이 윈난을 어떤 이미지로 생각했는지 정도는 참고할 수 있다. 실제로는 연의에서 한족 관리 출신으로 나오는
고정이 월수군 수족의 왕이었고, 맹획은
한족 출신으로 윈난성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과 세력을 갖춘 호족으로서 독립 국가를 세우려고 반기를 들었다가 225년
촉한의
제갈량에 의해
평정되면서 남중은 촉한의 통치에 들어온다. 일종의 준자치구가 됐다고 보면 될 듯.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운남 지역은 촉한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아 반란이 여러번 터졌다. 이는 촉한이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후달려 이민족에 대해 방임에 가까운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후 이곳에서 소수나마 군마가 나온 덕분에 촉한의 기병 전력 보충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맹획의 남만을
베트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베트남사 전문 역사학자
유인선이 2002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에서 맹획의 남만은 베트남이 아니라 윈난성의 서부 지역이라고 정정한 바 있다. 당시 베트남은
사섭이라는 인물이 통치하면서
오나라의 간접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곳은 서진 시기인 271년에 익주에서 영주(寧州)로 나뉘었고 옛 촉한 남중 지역의 4군을 거느렸는데, 그 땅은 대략 현재의 윈난성 지역에 해당한다.
동진,
유송,
남제 영주 관할에는 지금의 윈난성 전역,
구이저우성 중서부 지역이 있다.
양 중기 이후 폐지되었다가
서위(
북주)가 554년 남영주(南寧州)를 세웠다가 수나라 초에 남영주총괄부를 두었다 폐지하고, 그 땅은
남조의 전신인 육조가 차지했다. 한편 당나라는 이 지역의 남영주총괄부를 이어받아 남은 지역을 남영주(南寧州)라고 칭하고, 치소를 미현(지금의 윈난성 취징시 서북쪽)으로 했으며 634년에는 낭주(郎州)로 개명했다가 717년 남영주로 다시 개칭했고 당현종 천보말년인 754년 이곳도 남조에 점령되어 석성군으로 바뀌었다.
중세에는
남조,
다리 왕조(
대리국)가 있었던 곳인데
몽골 제국이 멸망시킨 후 운남등처행중서성(雲南等處行中書省)을 세웠다.
원나라는 이 지역에 이후
부하라 출신
색목인 관리 아잘 샴숫딘 우마르를 파견하여
쿤밍시를 건설시켰다. 아질 샴숫딘은 쿤밍 시를 다스리는 동안 모스크를 두 개 건설하였는데, 한동안 이 지역은 원나라 무슬림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나라 말기 운남에 고립되어 있던 몽골 괴뢰정권인 양왕(梁王)의 정권을 명나라 홍무제가 멸망시켰을 때, 이 지역에서 몽골 황족들을 도우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리 단씨는 양왕국을 배신하고 명나라에 붙어 그 공으로 재독립을 꿈꾸었다. 하지만 대리의 은광산에 눈독을 들인 홍무제 주원장은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운남등처승선포정사사(雲南等處承宣布政使司)를 세워 1390년에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명나라는 대리 단씨를 비롯한
바이족을 귀속시킨 이후로도 대리국의 왕족들에게 계속해서 총독, 진무 같은 벼슬을 주면서 현지의 토사(土司)로 삼았다고 한다.
그 밖에도
명나라 대에는 이 지역
먀오족과
야오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 진압 구실로
나하추가 이끄는 귀순 몽골군들을 대거 파견하여 열대성 질병으로 죽게 만든 적도 있고 당대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자로 올라선
미얀마의
따웅우 왕조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 지역
후이족들이 자체적으로 격퇴하였다. 19세기 중반 청조 말에는 할아버지 대에 한족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두문수(杜文秀)가
바이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평소 바이족과 사이가 나쁘던
나시족을 학살하고 잠시나마 윈난 성을 거점으로 술탄으로 즉위하여
평남국을 건국하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
중원'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윈난성은 중국의 세력이 약한 지역이었고, 확실하게 중화제국에 편입되어 중국의 영토로 인식된 역사는
원나라 이래로 꽤 짧은 편이다. 그리고 윈난 서북쪽 고지대는
티베트인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민족, 역사, 지역색이 뚜렷하게 다른 소수민족 지역에 비해서는 한족을 비롯해 수많은 민족이 섞여있기 때문에
분리주의는 거의 없다.
위안스카이 집권,
호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탕지야오가 창시한
전계군벌이 지배했고
북양정부에 노골적으로 적대하며 맞서는 반독립적인 지역(자체적인 윈난 화폐, 윈난 애국주의 교육 등)으로 남았다. 이후
룽윈(용운)이 지배권을 잡았으나
장제스(장개석)가 영도하는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강대해지면서 중앙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중일전쟁 중에는 중앙에 복종하여 항일전을 수행했으며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했을때 버마와의 접경 지역 일부가 점령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국공내전 중에 룽윈을 비롯하여 전계군벌 세력이 숙청되면서 중앙에 반감을 품고 공산당에 투항하게 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게 되었고, 일부
중화민국군 병력이 국공내전 이후에도
버마로 넘어가 이곳을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이어가서 1950년대에는 충돌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